하나님은 경험보다 크시다

구약성경에는 잠언, 전도서, 욥기와 같은 지혜서(wisdom book)가 있다. 지혜서에는 “어떻게 가치 있는 인생을 살 것인가?”의 해답이 들어있다. 인간은 본능에만 충실하게 살 수 없고, 가치를 추구한다. 인간에게 무가치는 허무감, 회의감으로 연결된다. 지혜서의 결론적 진술은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로 살라는 것이다. 과연 하나님의 지혜로 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이론으로는 어느 정도 수긍이 가지만 실천의 방법에는 여간 어렵지 않다. 종교개혁자 인 쯔빙글리(Zwingli)는 “유한은 무한을 담을 수 없다(the finite cannot grasp the infinite)”고 했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신자의 실천적 절망이 있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힘도, 행할 수 있는 능력도 없는데 어찌 해야 하는가? 우리는 중세철학에 있어 진리에 이르는 방법인 부정의 길 (via negativa)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것은 ‘진리는 …이다’라는 형식의 부정(否定)으로, ‘진리는 …. 아니다’를 통해 진리를 파악하는 것이다. 신자가 완전하게 하나님의 뜻과 의도를 다 정확히 파악하지 못해도, 최소한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라는 실천 명령을 통해 신앙적 가치를 이해하는 것이다

본문에는 욥의 세 친구 중 하나인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등장한다. 그는 경험많고, 노련한 지혜자이다. 예레미야서에는 데만 사람들의 지혜를 기록하고 있다. 에돔 지역의 일부인 데만에는 대대로 현자(賢者)가 많았다고 한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관점을 소유한 신앙인이다. 그의 말 속에는 신앙적 진술이 주를 이룬다. 우리가 욥기의 주옥같은 글귀들을 찾으면 많은 부분이 욥의 말이 아닌 세 친구와 엘리후의 말임을 발견한다. 그들의 진술은 우리가 아는 신앙의 이해와 크게 다르지 않다. 7절에서 엘리바스의 논조는 “너의 재앙과 고난은 너의 죄 때문이다”. 소위 인과응보이다. 악과 죄를 뿌렸으니 그 열매를 네가 먹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빨리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라는 것이다. 이 말에서 신앙에서 벗어난 부분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8절에서 그는 7절의 진술의 이유를 댄다. “내가 보건대” 이 말은 자신의 경험적 지식을 말하는 것이다. 경험적으로 볼 때, 악을 심고, 독을 뿌린 자는 결국 그대로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것이다. 한 두 번의 경험이 아니라 일생을 살면서 얻은 삶의 지혜라는 것이다. 그는 10-11절에서도 자연법칙을 제시하면서 결국 사자의 사냥꺼리도 없어지고, 암사자의 새끼는 흩어진다고 은유한다. 맹수들의 최후가 처량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엘리바스의 말에 대해서 욥은 여전히 답답하다. 그의 고난이 인과응보로는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욥기의 서론인 1-2장은 의인은 욥의 고난이 자신의 죄와 상관없이 왔음을 보여준다. 의인에게 고난이 많다는 것이다.

경험의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큰 가치와 지혜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아무리 경험적 지혜가 뛰어나도 하나님보다 클 수 없다. 자기의 경험적 지식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헤아리거나 남을 정죄하는 것은 바른 것이 아니다. 경험만으로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은 경험에 제한되는 분이 아니다. 섣불리 자기 경험으로 남을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엘리바스의 진술이 참(truth)이라 할지라도, 이 진술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까지 이르러야 한다.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눅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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