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은 하나님과 소원한 관계에서 오기도 하지만 간절하고 절박한 기도 중에도 성큼 다가 옵니다. 기도가 속히 응답되지 않을 때, 우리는 낙심하게 되고 하나님을 향해 원망도 나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외면하시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버려짐의 외로움에 빠지기도 합니다. 영적인 조급증과 낙심은 기도에 대한 회의로 발전됩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 이것을 경계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눅18:1).
시편77편의 시인, 아삽은 “낙심하지 않는 기도”의 길을 찬양합니다. 본 시편은 찬양대장 아삽에 의해서 이스라엘 예배 공동체가 합창한 시입니다. 웅장한 선율 아래 신앙적 결단을 노래하는 합창곡입니다. 9절은 자신들의 심정을 그대로 묘사합니다. “하나님이 은혜 베푸심을 잊으셨고, 노하심으로 긍휼을 더 이상 베풀지 않으실까?” 외면당함의 고통입니다. 그러나 10-12절은 절망 속에서 희망을 봅니다. 여기에는 희망의 기도자의 지혜가 녹아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중 하나님의 외면을 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첫째,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던 시절을 추억해야 합니다. 10-11절에서 시인은 지존자의 오른 손의 해, 곧 여호와의 옛적 기사를 기억한다고 고백합니다. 히브리적 표현으로 “오른손의 해”라는 것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고난을 이긴 큰 사건을 말합니다. 오른 손은 “엄청난 능력”에 대한 은유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는 출애굽의 사건입니다. 홍해를 가르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이셨던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입니다. 이것은 신자의 삶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말씀의 기초 위에 선 신앙적 체험은 귀합니다.
과거의 신앙 여정 가운데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은 낙담을 막는 길입니다. 기억한다는 뜻의 히브리어 “자칼”은 흔적을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일부러 신앙체험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신앙적 승리 속으로 자신의 기억을 던지는 것입니다. 외면치 아니하시고 체휼하시는 하나님의 흔적 속으로 다시 달려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통 속에 동행하셨던 하나님을 똑똑히 보는 것입니다. 극한 외로움 중에 위로를 주셨던 하나님의 음성, 육체적 고통의 신음 속에서 치유해 주셨던 하나님의 손길, 가능성 없는 일을 가능케 하셨던 하나님의 역사를 다시 상기해 보십시오. 과거 신앙 체험은 오늘의 신앙의 밑거름이 됩니다.
둘째, 하나님의 일하심을 깊이 묵상하는 것입니다. 12절에서 시인은 주의 모든 일을 묵상하겠다고 결단합니다. 히브리어의 “묵상”이라는 말은 소가 되새김질을 한다는 말에서 유래합니다. 계속적으로 곱씹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의도를 깊이 알고자 하는 열망의 태도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고통에는 뜻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우연이 없습니다. 목적 지향적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일하십니다. 그리고 절망에서 희망을 노래케 하십니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슬픔의 노래, 애가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그 은혜를 묵상하면서 잠잠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묵상은 인내를 가능케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동행하기 원하시고, 우리가 그 동행을 보기를 바라십니다. 묵상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구체적인 길입니다. 묵상할 때, 신자는 외면의 느낌보다 오히려 희망을 경험케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끝까지 소망 중에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신앙적 체험에 대한 기억과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묵상은 우리에게 참다운 신앙적 인내의 길로 안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