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려없는 인생이 있다

셰익스피어는 “근심은 생명의 적이다”라고 했습니다. 염려와 걱정 속에 사는 것은 불행의 시작입니다. 모든 인생의 어려움이 여기서 나옵니다. 성경은 근심의 원인을 단 한 가지로 지목합니다. 바로 인간의 죄성입니다. 범죄이후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두려움을 느낍니다(창3:10). 첫 살인자인 가인은 아벨을 죽인 후, 자신에게 지어진 죄벌의 무거움에 고통을 느낍니다(창4:13). 근심은 치명적입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잠15:13)”.

신자에게 있어서 걱정은 불신앙과 연결이 됩니다. 오늘 본문 32절에서 예수님은염려하면서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구하는 것은 이방인의 기도라고 단언합니다. 이 말씀은 신자의 기도는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6장 전체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실천한다면 염려없는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첫째, 바른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33절에서 신자의 구함에 우선적인 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righteousness)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하고, 못하는 것만 맡기는 것이 아닙니다. 전부 예외없이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내 모든 것을 맡기면 그 책임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의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성을 말합니다. 온전한 관계, 화평한 관계가 될 때,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좋은 관계에서 우리는 참된 자유를 느낍니다. 바른 선택이 여기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아서 그 길을 가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는 막연할 때가 많습니다. 이 때 늘 염두해야 하는 것은 내가 지금 하나님과 좋은 관계인가 하는 것입니다. 온전한 관계의 상태라면 우리는 뭐든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선택하는 것마다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존 맥아더 목사님의 설교 중 감동받은 예화가 있습니다. 청년 커플이 목사님께 왔습니다. “목사님, 저희는 서로 사랑합니다. 결혼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목사님의 답변은 간단 명료했습니다. “두 분이 육체적인 관계를 갖은 적이 있습니까?” 다소 의외의 답변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진리가 숨겨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에서는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 온전함, 의의 상태에서 선택한 것은 모두 옳은 것(yes)이 됩니다.

둘째,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가치를 추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앞선 부분에서 공중의 새도, 들의 풀도 하나님께서 기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물며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측량할 수 없음을 대조하십니다. 인간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해야 합니다. 세상의 가치는 물량주의입니다. 돈이 많고, 지위가 높고, 내세울 것이 있으면 성공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가치는 단 두가지 입니다.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했느냐, 이웃을 얼마나 사랑했느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최고의 사랑은 하나님을 예배하며, 그의 통치를 받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해서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가 예배하는 것입니다. 예배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삶의 예배가 곧 매 순간 하나님의 간섭을 받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은밀히 갚으시는 하나님을 보며, 구제하고 기도하고 금식하는 것입니다.

2016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염려없는 삶을 누리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Bookmark the permalink.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