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신앙으로 살라 [행4:16-19]

실존주의 심리학자인 롤로 메이(Rollo May)는 현대인에게 있어 가장 치명적인 병이 불안과 공허감이라고 지목합니다. 불안은 마음이 평안하지 않고, 무언가에 압박을 느끼는 상태입니다. 공허감은 목표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부족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세상은 항상 우리를 불안감과 공허감으로 몰아갑니다. 본문은 베드로와 요한 사도가 산헤드린 공회원 앞에서 선포한 설교입니다. 사도들의 메시지는 확신과 능력이 있었습니다.그들의 메시지의 중심은 단 한가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사도들은 선천적 장애인의 치유를 언급하면서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임을 명확히 합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죽으심 이후,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실망과 좌절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나약했던 제자 공동체가 성령님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실제적으로 체험했을 때,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18절에 보면, 유대 지도자들은 사도들을 경고하면서 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말하지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합니다. 유대 지도자들의 경고는 비진리가 진리를 만났을 때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을 실제적으로 체험하면 인생은 불안과 공허감의 위협 속에서 넉넉히 이기게 됩니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은 하나님에 의하여 (By God) 사는 것입니다.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평범하고 단순합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간구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님의 이러한 삶을 “자기 비움”(빌2:7)이라고 정의합니다. 비움이라는 말이 헬라어로 케노시스입니다. 이것은 자기 권리를 스스로 박탈하는 것이고, 힘을 빼는 것을 의미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자기의 능력과 지식, 권리, 원칙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맞추는 것입니다. 스스로 철저하게 약해지는 것입니다. 모든 스포츠의 공통적인 원리가 있습니다. 근육에 힘을 빼는 것입니다. 경직되고 의욕만 앞서면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합니다.16세기 사제였던 로렌조 스쿠롤리 (Lorenzo Scupoli)는 “영적 전쟁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자신에게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당신이 원하는 승리를 얻지 못할 뿐 아니라 적의 작은 공격에도 정항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승리의 원천은 우리는 약해지고, 하나님의 능력이 전부가 될 때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자랑합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능력은 하나님 앞에서 (Before God) 사는 것입니다.하나님의 능력으로 산다는 것이 우리의 나태함과 게으름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는 신앙적 열심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의 강압적 협박에 대해서 사도들은 19절 간단명료하게 대답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신자의 정체성은 “하나님 앞에 사는 인생”입니다. 하나님의 경외하고, 그의 말씀을 가장 우선하는 태도입니다. 누가 보던 보지 않던 우리 마음까지도 다 아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생활 중에 꿋꿋하게 신앙과 선비정신을 지킬 수 있던 것은 “혼자 있을 때 자기를 속이지 말라 (獨處毋自欺)”는 교훈 때문이었습니다. 요셉은 보디발 장군 아내의 유혹 앞에 담대한 신앙 선언을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찌 죄를 지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선 인생은 가장 경건한 인생입니다.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섬기며, 두려워할 수 있을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세상이 주는 불안과 공허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신자가 세상을 두렵게 하지 못한다면, 세상은 신자에게 공포심을 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능력입니다. 이 능력은 신자를 자유케하고, 강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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